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전쟁 특수 === 베트남 전쟁은 한국에 '전쟁특수' 효과로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에 진출해 눈부신 성장을 겪는다. 토목, 건설업 기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졌는데, 대체로 해외에 주둔한 미군 기지와 관련된 공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해외에서 많이 성장한 기업은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건설이 있다. 현대건설은 지역 공사, 건설공사 등 건설 도급을 통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1,9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다. 타이에도 발을 넓혀 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엄청난 외화를 한국에 벌어다 줬다. 토목, 건설업 기업들은 대체로 1965년에 해외에 진출했고, 1968년에는 베트남, 타이, 일본, 미국에서 활동하며 계약액이 무려 2,570만 6,000달러에 이르게 된다. 토목, 건설업 이외에도 미국에 대한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기업이 성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으로 인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이 주를 이뤘다. 대표적으로 신발, 의류, 합판, 가발이 있다. 이중 섬유 수출과 합판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1969년에 대미 섬유 수출로만 1억 달러를 최초로 찍을 만큼 섬유 수출의 성장이 굉장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전, 한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중화학공업을 포함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 한국 정부에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는 한국이 무기 산업을 중심으로 중공업 육성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아가 국방과학연구소, 무기개발위원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설립됐고, 외국에 전문가들이 파견돼 군수산업을 배워오는 등 한국 정부는 군수산업의 발전도 이룰 수 있었다. > 월급 350 ~ 400 달러. 별도의 숙식비 180달러 포함해 총 530 ~ 580 달러의 월급 > ---- > 1966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술자 광고 외국 기업에서 종사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의 월급 송금도 전쟁특수의 역할을 똑똑히 했다. 당시에는 신문에 국내 종사자들보다 상당히 높은 월급의 기술자 광고가 실렸고, "베트남에서 1년만 일하면 한밑천은 거뜬히 마련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한국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꿈의 도시'였다. 기술자 파월의 경쟁률은 초기부터 10:1을 보일 만큼 뜨거웠다. 그렇게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 활동하는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수가 매년 1만 명이 넘었고, 한국에 월급을 송금했다. 또한 미군으로부터 받는 파병한국군들도 전투 수당을 본국에 송금했다. 파병 군인의 군납과 기술자 송금을 합산할 경우 대베트남 경제활동 수익의 39.1%에 해당하는 정도의 규모이다. [* 윤충로. (2008).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派)기술자의 저항 - 한진그룹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9, 93-128] 한편, 한국이 '직접 번' 외화 외에는 미국의 군사 원조가 경제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전쟁특수는 다양한 경로로 한국 경제의 지대한 발전 원천이 됐다. [* 박태균, 베트남 전쟁(서울: 한겨레출판, 2015), 221-229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